절의공파 항(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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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派) 소개

공의 휘는 항 이요, 자는 내융(內融) 이며 호는 절위시다. 성은 崔씨요 본관은 慶州이나 최치원을 시조로 모시지 않고 언위(彦?)를 시조로 하고 있다. 언위의 3자 광원(光遠) 광원의 장자이시다.

父는 비서소감 이신 광원이다. 공은 광종 23년(972)에 탄생. 성종 때에 20세로서 갑과에 등제하니 왕은 그 재주를 가상히 여겨 우습유지제고(右拾遺知制誥)에 발탁하였다. 그 뒤 여러 벼슬을 거처 내사사인(內史舍人)이 되었다. 목종 때 거듭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훌륭한 인재를 많이 뽑아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으며, 이부시랑 중추원사(吏部侍郞, 中樞院使)를 지냈다. 김치양이 불궤를 꾀하자 채충순 등과 함께 계책을 세워 현종을 맞았다. 현종 즉위 초에 한림학사승지 좌산기상시 가 되었다가 얼마 뒤에 정당문학(政堂文學)으로 승진하였고 왕의 사부(師傅)가 되었으며 현종에게 청하여 성종이래 폐지된 팔관회(八關會)를 부활시켰다. 1012년(현종 3년) 이부상서 참지정사 감수국사<吏部尙書參知政事監修國史>를 거처 1016년에는 내사시랑평장사(內史侍郞平章事)가 되었다. 1020년 추중진절위사공신(推忠盡節衛社功臣), 이듬해에 검교태부 수문하시랑 동내사문하평장사 청하현개국자 식읍오백호<檢校太傅 守門下侍郞 同內史門下平章事 淸河縣開國子 食邑五百戶>의 관작을 받았고 水正功臣(수정공신)이 되었다. 평소 관직생활을 좋아하지 않았으므로 70세가 되기 전에 치사(致仕)하기를 청하여 현종이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않았다. 불교를 깊이 믿어 경주 황룡사탑의 수리를 자청하여 몸소 감독하기도 하였고, 또 자기 집에 불경과 불상을 만들어 두고 중처럼 지내다가 마침내 집을 희사하여 절로 만들었다, 1025년 병이 위독 하자 왕은 친히 문병하였고 그가 죽자 몹시 애도하며 후하게 부의 하였다. 과목하고 단결력이 있었으며 청렴결백하여 집안에 저축이 없었다고 한다. 뒤에 현종 묘정에 배향 되었고 1033년(덕종2년)정광(正匡)에 추증 되었으며 정종은 시중을 가증(加贈)하고 최항의 기일에는 유사에게 명하여 도량을 현화사에 베풀고 명복을 빌었다. 1067년(문종21) 수태사 겸 중서령(守太師 兼 中書令)이 가중 되었다. 시호는 절의 이다. (고려사.고려사절요)

현종 16년(1025)에 享年 54세로 卒 하시다. 배는 목종 묘에 배향 하시다.

  ― 승지공파숭 (承旨公派 崇)


 정광 : 고려 때의 관계 태봉의 제도를 따라 정한 것으로 6대 성종 14년(995)에 특진으로 개창하고 26대 충선왕(1310)에 정2품의 하로 했다가 31대 공민왕5년(1356)에 폐하였다.


 중서령 : 고려때 중서문성의 종1품의 우두머리 11대(1061)에 내사령을 고친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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