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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2.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3.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4.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5.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6.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7.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8.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9.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저자 : 春崗 崔根德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선비 - 孤雲 崔致遠

신라 경문왕 8년(서기 868년, 戊子) 번영을 극하던 신라 천년의 사직(社稷)도 어느덧 황혼으로 접어드는 무렵, 소년 최치원은 청운의 꿈을 안고 당(唐) 나라 유학의 길에 오른다. 열두 살의 어린 나이였다. 신라의 수도 서라벌에서 당나라 수도까지 수륙으로 몇 만 리, 그야말로 아득한 노정이었다. 우선 서라벌에서 항구로 나와 배를 타기로 했다. 당에서 온 장삿배(商船)였을까, 아니면 큰 나라의 문물(文物)을 실으러 가는 신라의 배였을까, 그곳까지 따라온 아버지 견일(肩逸)이 배에 오르는 아들의 손을 잡고 말했다. "당 나라에 가거든 공부 열심히 해야 된다. 십 년 안에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마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터이다. 가서 부디 부지런히 공부하거라." 소년 최치원은 뭐라 대답하였을까,  "아버님의 말씀 가슴에 깊이 새겨 두겠습니다. 당나라 가서 열심히 공부해서 기어코 십 년 안에 과거 급제를 하고 말겠습니다. 염려 마십시오." 굳게 맹서를 했는지 모른다. 그 당시 신라에서는 당 나라에 유학생을 많이 보내고 있었다. 요즘 말로 치면 국비(國費) 유학생도 있고, 사비(私費) 유학생도 있었다. 국비 유학생은 숙위학생(宿衛學生)이라 했는데, 선덕여왕(善德女王) 9년(서기 640년)부터 시작되었다. 신라의 귀족층 자제들을 유학이라는 명분을 붙여 당 나라로 데리고 가서 일정 기간 동안 공부를 시키고 머물게 했는데, 다분히 인질(人質)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 신라를 견제하기 위한 수단이기도 했다. 숙위학생의 숙식 의복 등은 당 나라에서 부담하였는데, 홍려시(鴻臚寺:지금의 외무부)에서 이를 관장하였다. 신라 본국에서는 강서비(講書費) 즉 책사는 돈만 지출했다. 이에 비해 사비 유학생은 많은 비용을 부담해야 되었고, 그래서 그 수가 많지 못했다. 어쨌거나 신라의 견당유학생(遣唐留學生)은 당 나라에서 모두 열심히 공부했던 것 같으며, 또 우수한 재질을 갖추고 있었다. 당에서는 외국인의 벼슬길 진출을 위해 빈공과(賓貢科)란 과거 제도를 설치하고 있었다. 최근 중국은 서기 9세기에서 10세기에 걸쳐 당 나라 수도 장안(長安)에 유학한 신라인은 2백60여 명이고, 그 중 90명이 관리시험에 합격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소년 최치원은 아버지의 엄훈(嚴訓)을 잊지 않았다.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서 부지런히 학업에 정진했다. 조금도 한눈을 팔지 않았다. 그는 후일 술회하고 있다. "저는 그 엄격하신 가르침을 가슴속에 새겨 잠시도 잊지 않고 열심히 공부하였으며, 그 바람을 받들어 뜻을 길렀으니 실로 남보다 몇 곱절이나 더 노력해서 유학 온지 6년 만에 과거에 급제하였던 것입니다."(<계원필경서(桂苑筆耕序)>)
아버지와의 약속은 10년이었지만 그는 6년 만에 해내고 말았다. 천재와 노력이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열여덟 살 되던 해(874년, 甲午) 9월 예부시랑(禮部侍郞) 배찬(裵瓚)이 주시(主試)로 관장한 제과(制科)에 응시해서 단번에 급제를 하고만 것이었다. 신라 청년의 우수성을 대당제국(大唐帝國)에 높이 인식시켜 준 것이었다. 더구나 당의 조정에서는 다음다음 해 겨우 20세가 된 그를 일약 현위(縣尉)로 등용한다. 현위는 한 지방을 다스리는 행정관으로 영장(令長), 승(丞) 다음으로 높은 고관이었다. 따라서 녹봉(祿俸)도 많았다. 그도 말하고 있다. "녹(祿)이 후하고 공무(公務)는 한가로워 하루 내 배불리 먹었다." 사실은 하루 내 배불리 먹고 한가로이 보낸 것은 아니었다. 그는 공무 틈틈이 지은 글들이 모이자 책으로 엮었는데 무려 다섯 권이나 되었다. 이 책이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이다.(지금 전하지 않는다) 현위로 부임한 곳이 선주(宣州) 율수(溧水, 漂水라고도 한다)로서 중산(中山)도 그 지방 이름이다. 열두 살 어린 나이에 만리(萬里) 이역(異域) 물설고 낯설고 거기에다 언어조차 통하지 않는 외국에 나가 각고(刻苦) 6년 만에 과거 급제를 하고, 이어 일약 지방 행정관으로 나가게 되었으니 그 재주와 인품의 뛰어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약관(弱冠)의 외국인이 대 제국의 행정관으로 어떤 다스림을 폈는지 자못 궁금하기조차 하다. 그는 서라벌의 사량부(沙梁部, 혹은 本彼部)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의 이름은 견일(肩逸)이었다. 성은 최(崔), 이름은 치원(致遠), 자(字)는 고운(孤雲) 혹은 해운(海雲)이라 했고, 호(號)도 또한 고운(孤雲)이라 일컫는다. <삼국사기(三國史記)>(本傳)에는 "공은 풍채가 아름답고 어릴 적부터 정민하고 학문을 좋아했다"고 적고 있다. 선생은 문성왕 19년(서기 857년, 丁丑)에 탄생했다. 신라 46대 왕인 문성왕(文聖王)은 곧 돌아가고 9월에 왕숙(王叔)되는 훤정(諠靖 또는 祐靖, 성은 金氏)이 왕위에 오르는, 말하자면 헌안왕(憲安王) 1년에 해당된다.


 우리 國學의 첫門을 연 孤雲 崔致遠

문성왕(文聖王)재위 연대는 천 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노(老) 제국 신라에 이미 쇠망의 조짐이 짙게 나타나고 있었다. 나라의 상하에 향락과 안일의 풍조가 널리 퍼지고 있었고 왕실 측근의 야심가들은 저마다 왕위를 노려 거침없이 반란을 일으키곤 했다. 따라서 중앙 정부의 위엄이 땅에 떨어져 지방 호족(豪族)이 예사로이 왕권에 도전하기도 했다. 그 중 가장 위세를 떨친 것이 장보고(張保皐)로 그는 뛰어난 용맹과 경륜으로 청해(淸海 :莞島)에 진(鎭)을 설치하고 이른바 해상 왕국(海上王國)의 웅지(雄志)를 불태웠다. 드디어는 중앙 정부에 세력을 뻗쳐 왕위 계승 다툼에 개입했고 반란도 일으키는 등 크게 위력을 발휘했다. 문성왕에 의해 진해장군(鎭海將軍)의 칭호를 받아 일본 ․당(唐)과의 활발한 무역을 펴는 한편, 중앙에 더욱 세력을 부식했지만 종내 왕이 파견한 자객의 손에 죽고 말았고, 해상 왕국의 꿈도 사라지고 말았다. 왕위를 둘러싼 잦은 정쟁과 반란, 속으로 곪아가는 향락과 안일의 병폐, 이와 더불어 급속히 이반(離叛)되어가는 민심은 결국 천 년을 헤아리는 통일 제국이 사양의 길로 들어섰다는 예고이기도 했다. 이런 말기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선생은 청운의 대망을 품고 당으로 유학을 떠났던 것이다. 전대미문(前代未聞)의 대제국(大帝國)을 건설한 당(唐)도 그 무렵 역시 흥성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지만, 의연히 세계 문화의 중심으로 자처하기에 족했다. 선생의 가문인 최씨(崔氏)는 신라 6성(姓)의 하나로 진골(眞骨 :王族) 다음가는 육두품(六頭品)이었고, 상위 신분 계급에 속해 있었다. 수도 경주의 사량부(沙梁部)를 중심으로 세거(世居)하면서 명문을 이루었던 것이다. 특히 신라 말기에 일대삼최(一代三崔)라 일컫는 영재들을 배출했으니 세분이 모두 도당(渡唐) 유학생이었다. 일대삼최란 선생(致遠)과 승우(承祐) 인연(仁渷)을 말하는 것으로 승우는 진성여왕(眞聖女王) 4년(서기 890년) 당으로 건너가 국학(國學)에서 3년간 공부했고 예부시랑(禮部侍郞) 양섭(楊涉)이 고시관(考試官)이 된 빈공과에 급제했다. 문명(文名)을 날려 문집으로 󰡔호본집(餬本集)󰡕을 남겼다고 한다. 인연(後名 彦撝 또는 初名 愼之)은 선생의 종제(從弟)로 18세에 당에 유학해서 급제하고 귀국 후에는 여러 벼슬을 지냈으며, 뒤에 고려에 입사(入仕)해서 태자사부(太子師傅)가 되고 문한(文翰)을 위임 받았다. 글씨에도 뛰어 났었다. 선생의 아버님 견일도 상당한 인물이었던 모양으로 선생이 찬(撰)한 숭복사(崇福寺) 비문(碑文)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들어 있다. "경력(慶歷, 定康王 元年) 병오년(丙午年) 봄에 하신(下臣)을 돌아보시며 이르시되, 예(禮)에 이르지 아니했더냐, 명(銘)이란 스스로 이름함이니 그 선조의 덕을 칭송해서 후세에 밝게 나타나게 하는 것으로, 이것이 바로 효자 효손의 마음이라 했느니라. 선조(先朝)에서 절을 이룩할 처음에, 큰 서원(誓願)을 발하셨는데 김순행(金純行)과 너의 아버지 견일이 일찍이 이에 종사했었다. 명이 지어지면 나와 너 둘이 함께 효심을 이루게 되는 터이니 그대는 마땅히 명을 짓도록 하라." 엄부(嚴父)의 당부를 지켜 이역에서 급제를 하고, 스무살 젊은 나이에 대당제국 선주(宣州)의 율수현위(溧水縣尉)에 임명되었던 선생은 이듬해 겨울 사직했다. 고병(高騈)에게 올린 편지에 "전년 겨울 현위를 그만두고 굉사과(宏詞科)에 응시할 것을 바라 산 속에 들 결심을 해서 잠시 은퇴하였으며, 학문이 바다에 이르기를 기약해서 다시 스스로 갈고 닦았다"고 한 것을 보면 새로운 도약을 기해 한번 더 공부에 정진하려고 했던 것 같다. 그러나 "녹봉이 남은 것이 없고 공부할 양식이 모자라서" 다시 관로로 나설 것을 모색했다. 때마침 황소(黃巢)의 반란군이 크게 군력(軍力)을 떨쳐서 수도 장안을 함락시키기에 이르렀고, 당황한 조정에서는 사천절도사(四川節度使) 고병을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으로 삼아 관군의 총지휘를 위임했다. 고병은 평소 선생의 인격과 문명(文名)을 잘 알고 있었던 사람으로, 중책을 맡게 되자 선생을 종사관(從事官)으로 초빙해서 서기의 책임을 맡겼다. 이후 4년간 선생은 군막(軍幕)에서 필봉(筆鋒)으로 적의 예기(銳氣)를 꺾게 된다. 천하의 문장가로 이름을 날리는 계기가 되는 것이다. 황소의 난을 말하자면 그 시대적 배경을 짚어 보지 않을 수 없다. 주지하다시피 당은 중국 대륙에 성립된 통일 제국으로는 한(漢)에 이어 두 번째로 흥성을 극한 나라였다.(서기 618년 건국) 지역적으로 보나 문화적으로 보나 한을 훨씬 능가했고, 개방적인 문화정책으로해서 세계적임을 지향하고 있었다. 특히 2대 태종(太宗)이 이룩한 정관(貞觀)의 치(治)와 6대 현종(玄宗)에 의한 개원(開元)의 치세(治世)는 문화의 꽃이 만개한 태평성세(太平盛世)로 전성기를 이루었다. 인근 각국에서 문물 제도, 학술 사상을 배우려는 유학생이 구름처럼 모여들었고, 당에서는 이들에게도 등용의 문을 열어 주어 빈공과(賓貢科)란 과거제도를 설치해서 외국인 준재들을 뽑아 관로에 나서게 했다. 원래 천하 대세란 흥(興)이 있으면 쇠(衰)가 있는 법. 미증유의 대제국 당(唐)도 치세(治世)를 거치면서 숱한 모순과 병폐가 미여져 나와 드디어는 난세(亂世)로 접어들기 시작했다. 현종 때의 안록산(安祿山)의 난을 발단으로 해서(서기 755년), 구보(裘甫)의 난(859년), 방훈(龐勛)의 난(868년)이 잇달아 일어나 국운은 쇠락기를 맞이하고 있었다. 흥성의 고비를 넘기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잦은 반란에도 불구하고 당 제국은 의연히 세계 문화의 중심지로 그 자리를 누리고 있었는데 드디어 대대적인 농민 반란이 터지고 말았다. 황소의 난이 바로 그것이다.

 

 우리 國學의 첫門을 연 孤雲 崔致遠

황소는 조주(曹州) 사람으로 5세 때 시를 지을 정도로 조숙했고 무예에도 능했으며, 과거에 낙방한 후로는 가업인 소금 암매매(暗賣買)에 종사해서 부를 쌓았다. 875년 왕선지(王仙芝)가 반란을 일으키자 이에 호응해 군사를 일으켰고, 왕선지가 패사(敗死)한 후로는 그 남은 무리를 모아 스스로 솔토대장군(率土大將軍=衝天大將軍)이라 일컫고 하남(河南)․ 강서(江西)․ 산동(山東)․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호남(湖南)․ 호북(湖北) 등 여러 성을 공략하였고, 880년에는 낙양(洛陽)․ 장안(長安)을 함락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놀란 희종(僖宗)은 사천(四川)으로 피난을 했고, 사천절도사(四川節度使) 고변을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해서 반란군 진압의 대권을 위임했다. 고변은 문장․ 학문을 이해하는 무인(武人)으로 천평(天平)․ 검남(劍南)․ 진해(鎭海) 등의 절도사를 역임했고, 황소의 난이 확대되자 천하에 격문(檄文)을 보내 모병을 하고 토적군(討賊軍)을 대대적으로 일으켰다. 위세가 일세에 떨쳐 천자에 의해 토적의 전권을 위임받게 되자 우선 선생을 종사관으로 초빙한 것이었다. 고병이 선생을 종사관으로 발탁한 것은 평소의 문명을 흠모한 탓도 있지만, 선생과 동년(同年=同榜:같은 해 급제함)인 고운(顧雲)의 추천을 참작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고운(顧雲)은 지주(池州) 사람으로 자를 수상(垂象)이라 했는데, 재기 발랄한 소장 학자로 고병이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시절 종사관을 지냈었다. 선생과는 의기투합하는 사이로 매우 가까이 지내는 벗이었다.(顧雲은 후에 대학자로 대성한다.) 고병의 초빙을 받은 선생은 사양하는 글을 보냈다. 두 번에 걸쳐 완곡하게 사양한다. "모(某)는 아룁니다. 저는 삼가 생각컨대 줄이 짧은 두레박으로는 깊은 샘물을 길을 수 없고 무딘 칼날로는 단단한 것을 뚫을 수 없습니다. 그러니 할 수 없는 일은 그만둘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주임(周任:옛 賢者, 周나라의 史家)은 말했습니다. 스스로 마땅히 힘을 헤아려서 행할 것이지, 어찌 마음이 하고 싶은 대로만 따를 것인가. 저는 동해의 한 선비인데 지난날 만리 밖으로 집을 떠나 10년 동안 중국에 유학한 것은 본래 말석이나마 과거에 급제할 것과 강회(江淮) 지방의 한 현령이나 바랐을 뿐입니다." 이때의 일을 <삼국사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때에 황소가 반하자 고병이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營兵馬都統)이 되어 토벌을 하게 되었는데 치원(致遠)을 초빙해 종사관으로 삼고 서기의 소임을 맡겼으며, 그 표장서계(表狀書啓)가 지금에 이르기까지 전하고 있다." 정식 관직은 승무랑(承務郞)으로 시어사(侍御史) 내공봉(內供奉)을 띠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되며,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에도 도통순관(都統巡官) 시어사 내공봉을 일컫고 있다.  이후 4년 동안 선생은 고병의 군영에서 많은 글을 짓게 되는데, 그 중에서 가장 유명한 것이 '격황소서(檄黃巢書)'이다. 이 글은 종사관이 된 바로 그 해(唐 僖宗 廣明 2년, 서기 881년) 반란군의 총수인 황소에게 보낸 것으로, 말하자면 관군 총사령관의 격문이다. 글 첫머리부터 심오한 뜻을 함축하고 있는 명문으로 24세 되는 청년 최치원의 학문의 깊이를 가늠할 수가 있다. "대저 바른 것을 지키고 떳떳함을 닦는 것을 도(道)라 하고, 위험에 다다라 변통(變通)을 강구하는 것을 권(權)이라 한다. 슬기로운 자는 때에 순응하면서 이루고, 어리석은 자는 이치를 거슬리는데서 패한다. 그러한 즉 비록 백 년의 수명에 죽고 사는 것을 기약하기 어렵지만, 모든 일은 마음이 주가 되어 옳고 그름은 분별될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불지르고 겁탈하는 것을 좋은 짓으로 삼고, 죽이고 상하게 하는 것으로 급선무로 삼아, 큰 죄는 헤아릴 수 없이 많으나 속죄할 수 있는 조그만 착함도 없으니, 천하의 사람들이 모두 너를 죽이려고 생각할 뿐 아니라 또한 땅속의 귀신까지도 은밀히 죽일 것을 의논하였을 것이니, 네가 비록 숨은 붙어 있다고 하지만 넋은 이미 빠졌을 것이다" 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글을 읽던 황소가 혼비백산(魂飛魄散)한 나머지 저도 모르게 앉아 있던 의자에서 굴러 떨어졌다는 얘기가 전해 오고 있다. 스물네 살에서 스물일곱 살까지 만 4년 동안은 고병의 군막에서 이와 같은 글을 쓰는 일에 종사했다. 글의 종류가 표(表)․ 장(狀)․ 서(書)․ 계(啓)․ 격문(檄文) 등 다양했는데 그 수도 굉장했던 것 같다. 훗날 고국으로 돌아와 이때의 글들을 모아 <계원필경집> 20권을 편찬해 헌강왕(憲康王)에게 올렸는데, 그 서문에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회남에 종직하며 고시중(高騈)이 글 쓰는 일을 전임하게 되자 몰려드는 군서를 힘을 다해 도맡았습니다. 4년 동안 용심한 것이 만여 수나 되었는데, 줄여 없애기를 거듭하고 나니 열에 한 둘도 남지 않았습니다마는, 감히 모래를 파헤쳐 보물을 찾아내는 일에 견주고, 기와를 헐고 흙손질한 벽에 금을 긋는 일보다는 조금 낫다고 여거서 드디어 <계원집> 20권을 이루었습니다."  4년 동안 일만여(一萬餘)편의 글을 지었다고 하니, 그 박식함과 그 필력에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孤雲 崔致遠

노산(鷺山) 이은상(李殷相)은 이 대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아라비아 기록에 의하면 황소가 반란을 일으킨 곳은 광동지대요, 거기서 회회교인(回回敎人)․기독교인․유태인․파사인(波斯人)들 10만여명이 죽었는데, 그때 그곳에는 우리 신라 사람들도 많이 가 살고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더욱더 분노를 참지 못하여 실감 있는 글을 썼던 것이다."(부산 해운대 동상 비문의 한 구절) 그러나 애석하게도 이 글들이 우리의 사상사(思想史)나 유학사(儒學史)에는 크게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국(異國)의 군막(軍幕)에서 저희들끼리의 싸움에 다른 사람 이름(주로 관군측 사령관인 고변)으로 내쏟은 글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학문이 무르익고 필력이 용솟음치던 그 시절에 성경현전(聖經賢傳) 연구에 몰두할 수 있었던들, 저술 활동에 정력을 쏟았던들 길이 후세에 전해질 빛나는 금자탑이 이룩되었을 것이고, 우리의 사상사도 그만큼 살찌워졌을 것이다. 어쨌거나 선생은 이때의 공으로 당제(唐帝)로부터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는 명예를 누렸다. 금어대(金魚袋)란 붕어모양으로 만든 금빛 주머니로서 벼슬아치들이 띠에 차게 되어 있었다. 금어대 중에서도 자색은 높은 표징이었고, 금어 아래에는 은어가 있었다. 주머니 속에 성명을 적은 표언(標言)이 있어 일종의 면책 특권이 있고 궁중에 드나들 수도 있었다. 28세 되던 해(서기 884년, 甲辰) 선생은 드디어 귀국할 뜻을 굳혔다. 황소의 난도 평정이 되어 군막의 필역(筆役)에서 놓여나게 될 수 있었고, 때마침 신라 본국에서 사신 김인규(金仁圭)가 입당(入唐)한 것이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리고 사신 김인규를 따라 사촌아우 서원(棲遠)이 왔으니, 아마도 선생의 귀국을 독촉하기 위한 것이 아니었던가 짐작된다. 선생은 서원에게서 오랜만에 집안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불현듯 망향의 정이 솟구쳤다. 상관인 고병을 통해 조정에 진정을 했는데, 당시의 황제 희종(僖宗)은 돌아갈 뜻이 간절함을 알아차리고는 허락을 해주었다. 더구나 그 사이의 공에 보답하는 뜻에서 국서(國書)를 가져가는 사신의 임무를 띠게 특별히 조처를 내려주기도 했다. 고병은 2백관이라는 막대한 돈과 일체의 행장을 챙겨주었고, 심지어 뱃머리에 달면 풍랑이 일지 않는다는 약주머니(藥帒子)까지 보내주는 것이었다. 지극한 인정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선생이 귀국한다는 소식에 문우들이 다투어 석별의 잔치를 베풀고 시도 보냈다. 가장 가까운 동년의 벗인 고운(顧雲)은 읊고 있다.

 

내 들으니 바다위에 세마리 금자라 있어서 금자라 머리 위에 아스라하니

높은 산들 이고 있다네.

산위에는 주궁(珠宮) 패궐(貝闕) 황금전(黃金殿)

산 아래에는 천리 만리 우람한 파도들.

그 옆에 한 점으로 찍힌 계림(鷄林)이 푸르르니
자라산 빼어난 정기로 기남아(奇男兒)가 태어났네.

열 두 살에 배타고 바다를 건너와서 문장으로 중국을 뒤흔들고

열 여덟에 문단을 마음껏 횡행(橫行)해 단 한 살에 과거목표 쏘아 맞혔네.

 

사실 그사이 고국으로 돌아가고픈 마음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공부에 파묻히고 학문에 정진하고 벼슬길에 올라 임무에 몰두하다보니 어느덧 세월이 흘러 갔을 뿐이었다. 당에 머무는 동안 읊은 시들을 보면 만리 이역에서 얼마나 고독하고 얼마나 향수에 젖어 있었던가를 짐작할 수 있다.

 

가을바람에 애써 시 읊지만, 

세상엔 알아주는 이 없네, 

창 밖에는 밤깊도록 비듯는 소리,
등불 아래 마음은 만리를 달리네,

(秋風惟苦吟 世路少知音 窓外三更雨 燈前萬里心.

「秋夜雨中」)모래밭에 말 세우고 돌아오는 배 기다리니,

욱하게 아지랑이 낀 수면에 만고의 시름 깃드네.
산이 평지되고 또한 물이 말라져야 인간 세상에 이별이 없어지려는가.
(沙汀立馬待回舟 一帶烟波萬古愁 直得山平兼水渴 人間離別始應休.「題芋江驛亭」)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머나먼 타국에서 남모르게 겪는 향수, 고독, 이별의 정(情)이 그대로 시에 나타나 있다. 다음 시는 또한 뼈저리게 느껴야 하는 소외감의 표출이다. 중국에 와서 객지생활 오래하니 부끄럼 많은 만리 타국 사람이라네 안자(顔子)처럼 가난을 견디는데 맹씨(孟氏)집 같은 좋은 이웃 얻었네 도(道)지켜 오직 옛 공부하거늘 
사귀는 정이 어찌 가난을 꺼리리
타향에서 알아주는 이 적으니
자주 찾아간다 싫어하지 마오.
(上國羇栖久 多慚萬里人 那堪顔氏巷 得接孟家隣 守道唯稽古 交情豈憚貧 他鄕少知己 莫厭訪君頻. 「長安旅舍與于愼微長官接隣」)

 

고병이 풍랑을 진정시키는 약주머니를 주고 그걸 뱃머리에 매달았지만 효험은 나지 않았다. 망망대해에 산더미 같은 파도는 끝없이 밀려오기만 했다. 할 수 없이 부산(浮山)이라는 곳에 이르러 배를 멈추고 풍랑이 자기를 십여 일이나 기다렸지만 진정이 되지 않아, 종내 곡포(曲浦)에 정박해서 겨울을 날 수밖에 없었다. 외딴 항구에서 추위를 가리는 집도 허술했고 허기를 때울 끼니도 거칠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해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기쁨에 그저 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10월에 떠난 길이 기나긴 겨울을 지내고 이듬해 춘삼월 드디어 꿈에 그리던 고국의 땅을 밟았다. 열두 살 어린 아들을 배에 태워 보내면서 '꼭 성공하고 돌아오너라, 과거에 급제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고 결연히 말씀하시던 아버지는 성성한 백발 주름진 얼굴로 금의환향(錦衣還鄕)한 아들을 맞이했다.  "잘했다. 해내고 말았구나. 이제 나라를 위해 힘껏 일하도록 해라." 
그러나 조국 신라는 이미 쇠운(衰運)을 맞고 있었다.

 

 우리國學의 첫門을 연 孤雲 崔致遠

때는 헌강왕(憲康王) 11년(서기 885년, 乙巳)이었다. 왕은 크게 기뻐해서 시독(侍讀) 겸 함림학사(翰林學士) 수병부시랑(守兵部侍郞) 지서서감사(知瑞書監事)의 벼슬을 내렸다.  헌강왕은 신라 제49대 임금으로 기록에 의하면 문치(文治)에 주력했고, 그 결과 문화적으로는 신라일대에 있어서 최성기를 이룬 것으로 되어 있다. 서울 경주도 번영을 극해서 "성안에는 초가가 한 채도 없고 처마와 처마 담장과 담장이 잇달았으며, 노랫소리 풍악소리가 길에 그치지 않았다"고 했다. 일반 서민의 집도 기와로 지붕을 덮고 연기로 공기가 탁해진다고 해서 숯으로 밥을 지었으며, 처용무(處容舞)가 크게 유행해서 거리와 집에서 가무(歌舞)가 쉴 새 없이 베풀어졌다는 것이다. 사치와 환락의 바람이 크게 불고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불교가 극성하던 때라 호화스러운 불사(佛事)가 줄을 이었고, 대 사원의 창건도 잇달았다. 헌강왕도 황룡사(黃龍寺)에 고좌(高座, 上座) 백 개를 설치해[百高座] 불경을 강했다는 기록이 있으며, 선생에게 대숭복사(大崇福寺) 비문의 찬술을 명한 바도 있다. 그러나 정정(政情)은 불안해서 신라는 쇠퇴기에 접어들었으니 우선 잦은 반란과 왕위다툼의 빈발이 그 조짐이었다. 헌강왕 재세(在世) 때만 해도 일길찬(一吉湌) 신홍(信弘)이 반란을 일으켜 주살을 당했으며, 전후 대소 여러 번의 유혈사태가 빚어지고 있다. 선생은 이듬해 정월에 당 체류 중에 지은 글들을 모아 <계원필경집(桂苑筆耕集)> <중산복궤집(中山覆簣集)>, <시부(詩賦)> 3권 등을 편찬해서 왕에게 올렸다. 이중 <계원필경집> 전20권은 유일하게 지금까지 전해 오고 있으며, 우리나라 최고의 명문집인 동시에 한문학(漢文學)을 열어준 구슬 같은 작품들이 수록되어 있다.
<계원필경서(桂苑筆耕序)>를 옮겨본다.
회남에서 본국으로 들어오면서 겸해 조서(詔書) 등을 맡아온 사신이며, 전 도통순관(都統巡官) 승무랑(承務郞) 시어사(侍御史) 내봉공(內供奉)이고 자금어대(紫金魚袋)를 하사받은 신 최치원은 저술한 바 잡시부(雜詩賦) 및 표주집(表奏集) 28권을 올리옵나니, 그 목록은 다음과 같사옵니다.

 

私試今體賦 五首 一卷
五言七言 今體詩 共一百首 一卷
雜詩賦 共三十首 一卷
中山覆簣集 一部 五卷
桂苑筆耕集 一部 二十卷

신은 열두 살에 집을 떠나 서쪽(중국)으로 갔으며 배를 타려고 할 때, 돌아가신 아버님께서 훈계하셨습니다. "십 년 공부해서 과거에 오르지 못하면 내 아들이라 하지 말라. 나도 아들을 두었다 하지 않을 것이니, 가서 부지런히 하여라. 힘을 다하여라." 저는 그 엄격한 훈계를 가슴에 새겨 잠시도 잊지 않고 노력(荊棘)했으며 쉴 새 없이 뜻을 기르기를 바랐으니, 실로 남이 백 번하면 저는 천 번하기를 기약해 유학(觀光)한지 6년 만에 이름을 방(榜)의 말미(末尾)에 걸게 되었습니다. 이때 정성(情性)을 읊고 물(物)에 의탁하여 편(篇)을 이름 하기를 부(賦)니 시(詩)니 한 것이 거의 상자에 넘쳤으나, 단지 어린아이의 설익은 글이라 장부로서는 부끄러운 것입니다. 어대(魚袋)를 하사받음에 이르러서 모두 버린 바가 되었습니다. 이윽고 동도(東都)에 유랑하면서 붓으로 밥을 먹게 되자 드디어 부 5수, 시 100수, 잡시부(雜詩賦) 30수를 지니게 되어 합해서 3편을 이루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후에 선주(宣州) 율수현위(溧水縣尉)로 제수되자, 녹은 후하고 관(官)은 한가로워 종일 배불리 먹고 지내게 되었습니다. 벼슬에 여유가 있으면 배워야 하고 촌음도 헛되이 보내지 않아야 되는지라, 공사간에 지은 글이 모두 5권이 되었습니다. 더욱 산을 쌓는다는 뜻을 채찍질해 복궤(覆簣)라 이름 붙였고, 그곳을 중산(中山)이라 일컫기에 그 위에 얹었던 것입니다. 그 벼슬을 그만두고 회남(淮南)에 종직(從職)함에 이르러서는 고시중(高侍中)이 필연(筆硯:文書)을 다 맡기게 되었으며, 몰려드는 군서(軍書)를 힘을 다해 감당을 했었습니다. 4년 동안 마음을 쓰고 나니 만여 수가 되었는데 그 중에서 가려내어 버리고 나니 열에 한둘도 되지 않았습니다마는, 감히 모래를 헤쳐 보물을 찾는 일에 견주고 기와를 헐고 흙손질한 벽에 금을 긋는 것보다는 낫다고 여기어 애써서 계원집(桂苑集) 이십 권을 이루었습니다. 신이 때마침 난리를 당하여 융막(戎幕)에 몸 붙였으니, 이른바 끼니를 거기서 잇게 되었는지라, 문득 필경(筆耕)으로 제목을 삼고 인해 왕소(王韶)의 말로써 지난 일을 증거 삼았습니다. 비록 쓸모없이 돌아와 하찮음이 부끄러우나 갈아서 김매듯 마음의 밭을 파 헤쳤으니, 조그만 수고나마 스스로 아까워 성감(聖鑑)에 이르게 하고자 하옵니다. 시(詩) 부(賦) 표(表) 장(狀) 등을 모은 이십팔 권을 이글과 아울러 삼가 올리나이다. 중화(中和) 6년 정월 일(正月 日) 전도통순관 승무랑 시어사 내공봉 사자금어대(前都統巡官 承務郞 侍御史 內供奉 賜紫金魚袋) 신 최치원은 글월로 아뢰나이다.
헌강왕(憲康王)이 곧 돌아가고 후사가 없어 7월에 아우 황(晃)이 50대 왕으로 뒤를 이었으니, 이가 정강왕(定康王)이다. 다음해(서기 887년) 1월에 이찬(伊湌) 김요(金堯)가 모반했다가 죽임을 당했고, 곤욕을 치른 임금도 얼마 되지 않아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정강왕 역시 아들이 없이 돌아갔기 때문에 그 유조(遺詔)에 의해 누이동생인 만(曼)이 즉위했다. 바로 진성여왕(眞聖女王)이다. 신라에서는 이보다 앞서 선덕(善德) 진덕(眞德) 두 여왕이 있어 말하자면 세 번째 여왕이 탄생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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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성여왕은 국문학사에서 위홍(魏弘)과 대구화상(大矩和尙)으로 하여금 향가(鄕歌)를 수집해서 <삼대목(三代目)>이라는 향가집을 편찬케 한 것으로 일컬어지고 있지만,(지금 전해오지는 않는다) 정치는 혼란스러웠다. 몸을 가다듬지 못해 부정을 예사로 저질렀으니, 각간(角干) 위홍과 사통(私通)하는가 하면 위홍이 죽고 난 후에는 나이 어린 미장부(美丈夫) 두세 명을 궁중으로 불러들여 음란한 짓을 하고, 그들에게 요직을 주어 국정을 맡기기도 했다. 이렇게 되니 정치가 제대로 될 리가 없었다. 뇌물이 공공연히 오가고 상벌이 공정성을 잃었으며 나라의 기강(紀綱)이 문란하기 짝이 없었다. 시골 선비 왕 거인(王巨仁) 사건도 이때 일어났다. <삼국사기> <삼국유사>에도 이때 일을 자세하게 기록하고 있지만, 어쨌거나 어지러운 세상이고 지식인의 수난시대였던 것 같다. 선생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 사이 당에서 배우고 익힌 경륜을 펼 길이 없었다. 지우(知遇)인 헌강왕이 귀국한지 겨우 1년 만에 돌아가고, 그 후로 2년 사이 임금이 두 번이나 바뀌었으며 바른 말을 해도 용납이 되지 않았다. 주위의 질시도 없지 않았을 것이며, 신라 조정은 큰 그릇을 받아들일만한 분위기도 아니었다.
선생은 34세 되던 해(서기 890년, 庚戌) 외직인 지방관으로 나가게 된다. 태산군(太山郡) 태수(太守)다. 태산군은 지금의 전북 태인(泰仁)이다. 조선시대에 편찬한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치원이 서쪽(중국)으로 가서 배워 많이 얻은 바 있다고 자부했다. 동(신라)으로 돌아와서 장차 자기 뜻을 펴려고 했지만, 쇠퇴해 가는 말기라 의심하고 꺼려서 용납이 되지 않았다. 드디어 외직으로 나와 태산군 태수가 되었다."  이로 미루어보면 선생께서 지방장관으로 나간 것이 자의가 아니고, 거의 타의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외직으로 돌았다는 것으로 후세 사가들이 줄곧 인식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사실 귀국후 신라 조정에 서게 된 선생에게는 해외 선진국에서 얻은 명성이나 익혀 온 경륜(經綸)에도 불구하고, 기성세력에 의해 종종의 견제를 받지 않을 수 없었다.

첫째는 신분상의 제약이다. 선생의 가문은 육두품(六頭品)에 속했다. 이 육두품은 신라 두품제에 있어서는 최상위이고, 신라 육성(六姓)으로 일컬어지는 여섯 가문이 대개 이에 속했으니 상층계급이라 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육두품은 신라 17관등에서 여섯째 등급인 아찬(阿湌)까지만 오를 수 있었다. 그 이상의 승진은 용납이 되지 않았다. 육두품의 위에 왕족인 성골(聖骨) 진골(眞骨)이 있었던 것이다. 성골은 부모가 모두 왕계(王系)인 사람으로 이 계급층에 속하는 사람은 28대 진덕여왕으로 끊어져 버렸고, 부모 중 어느 한쪽이 한번이라도 왕족이 아닌 혈통이 섞인 경우인 진골 계층이 크게 흥성해서 사실상 권력의 중심부를 차지하고 있었다. 따라서 신라사회는 이 진골들이 주인행세를 하고 있었다. 바로 아래인 평민계급의 우두머리 계급이라 할 육두품은 버금가는 신분층에 불과했다.
중앙정계를 잡고 있는 진골들 속에서 육두품 출신인 선생이 운신에 부자유를 느끼고, 가슴속에 담긴 웅지(雄志)를 그대로 펼 수 없었음은 당연한 일이기도 했다.

둘째는 중앙정계의 말세적 증후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라란 노제국은 바야흐로 사양(斜陽)의 길을. 둘째는 중앙정계의 말세적 증후다. 앞에서도 말한 바와 같이 신라란 노 제국은 바야흐로 사양(斜陽)의 길을 걷고 있었다. 오랜 적폐(積弊)가 그대로 고질화돼 곪아 터지고 있었는데, 중앙의 권력심층부에서 이를 부채질하고 있었다. 여주(女主)의 무절제한 사생활, 암우(暗愚), 조정대신들의 부패, 무능은 극에 달해 더는 치료 불능의 상태에 빠져 있었다. 거기에다 진골족(眞骨族)들은 왕위를 둘러싸고 끊임없이 다투고 분열을 거듭해 오고 있었다. 육두품이 끼어들 여지가 없었다.  이밖에 결정적인 정세의 전환이 있었다. 지방호족의 대두다. 골품제도(骨品制度)로 해서 중앙정계에 진출할 길이 막혀 있었던 지방호족들은 진골왕족이 대립과 분열을 거듭하는 동안 그 견제세력으로 성장했고 드디어는 대담한 항거를 시도하고 나섰다. 정치적으로 중앙이 부패하고 혼란하며 경제적으로 수탈이 심해짐에 따라, 그들은 하나의 반란집단으로 세력을 굳혀 가고 있었다. 가장 먼저 일어선 것이 사무역(私貿易)에서 기반을 굳힌 해상세력이었고, 이의 대표적인 경우가 장보고(張保皐)이다. 그리고 진성여왕 2년부터 일어나기 시작한 공부불납운동(貢賦不納運動)은 급기야 각지의 반란으로 연결되어갔다. 상주(尙州)의 원종(元宗) 애노(哀奴), 북원(北原)에서 일어난 양길(梁吉), 도죽주(徒竹州 :竹山)의 기훤(箕萱), 완산(完山 :全州)의 견훤(甄萱), 양길 휘하에서 일어선 궁예(弓裔) 등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되어갔다. 이러한 사회 병리에 대해 육두품 세력을 주축으로 하는 지식인들은 강렬한 비판을 전개하고 있었던 것이다. 지방장관으로 부임한 선생은 여러모로 선치(善治)에 노력한 것 같지만, 그 효과는 나올 수 없었다. 연달은 흉년과 중앙정부의 가혹한 수탈에 재정이 결핍되어 있었고, 민심이 이반되어 행정도 제대로 시행이 되지 않았다. 다시 진성여왕 7년(서기 893년, 癸丑)에 부성군(富城郡, 지금 忠南 瑞山) 태수로 부임했다.  <고운선생사적(孤雲先生史蹟)>에는 이때의 일로 "왕이 불러 하정사(賀正使)로 삼았으나 길에 도적이 많아 가지 못했다"고 되어 있는 걸로 보아, 당 나라에 하정사로 다녀오게 되어 있었으나 사방에 도적이 일어나 부득이 중지했던 것 같다. 그리고 천령군(天嶺郡, 지금 慶南 咸陽郡) 태수를 역임한 사실이 선생께서 해인사 승려 희랑(希郞)에게 준 시제(詩題)로 미뤄 추측은 할 수 있지만, 언제인가는 기록에 나와 있지 않다.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생과 연관이 되는 전설이 함양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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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무렵 선생의 나이 37, 38세였다. 한창 나라를 위해 일할 장년기였지만 주위 형세가 그걸 허락지 않았다. 진성여왕 8년(서기 894년, 甲寅) 2월, 선생은 시무책(時務策) 10여조를 조정에 올린다. 나라의 어지러움을 보다 못해 그 타개책과 정치의 방향을 제시한 것이다. 그러나 아깝게도 그 원문이 전하지 않아 내용이 어떠한 것인지는 알 수가 없고, 윤곽을 추측해 보는 도리밖에 없다.
<최문창후전집(崔文昌侯全集)>(成均館大學校 大東文化硏究院 刊行)에 해제를 쓴 이기백(李基白)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위로는 강수(强首)나 설총(薛聰)의 전통을 이어 받고, 아래로는 최승로(崔承老)의 모범이 되었을 이 시무책은 중앙집권적인 귀족정치를 지향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선생이 생각한 중앙귀족이란 진골의 좁은 테두리를 벗어나서, 적어도 육두품을 포섭하는 개념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귀족층의 폭이 넓어지고 보면 신분보다는 학문을 토대로 한 인재등용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그의 정치적 개혁안은 보다 개방적인 성격의 것이었다고 추측되지만, 한편 그가 지방호족에 대해서까지 개방적이었을까 하는 데에는 의심이 가는 것이다. 선생은 세상을 떠나는 날까지 신라에 대한 충성을 잃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그 신라는 선생의 개혁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이다. 그렇다고 호족을 편들 수도 없었다. 당시의 사회적 현실과 자기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할 수 없었을 것이다."

진성여왕은 선생의 시무책을 가납하고 벼슬을 아찬(阿湌)으로 돋워주었다. 신라사회에서는 진골 이외의 신분이 오를 수 있는 최고의 벼슬이다. 그러나 가납은 했을망정 시무책이 실행되지는 못했다. 대국적으로 정치에 실행할 능력이 위에 없었고 구체적으로 시행될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다. 전국 각지에 확산된 반란이 악화 일로를 걷고 있어 정부는 이미 통치기능을 잃고 있었다. 곳곳을 반란군이 점거해서 교통이 차단되어 있었고, 따라서 정령(政令)이 통할 수도 없었다. 여러 해에 걸친 흉년과 지방에서의 세수 미납으로 중앙정부는 재정적으로도 지탱하기 어려울 정도였다. 선생의 이상(理想)은 어지러운 현실로 해서 실현될 가능성이 없었고, 용렬한 군왕에 의해 더욱 실망만 안겨 주었다.


<고운선생사적>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2월에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를 올리자 여왕께서 가납해 아찬으로 삼았다. 스스로 난세를 만난 것을 슬퍼해서 다시는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산수 간에 노닐어 오직 시 읊조리는 것으로 일을 삼았다." 선생께서 관직을 버린 것이 어느 해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동유록(東儒錄)>에는 병진년(丙辰年, 서기 896년)에 가야산으로 들어갔다 했고 <동국문묘십팔현 연보(東國文廟十八賢 年譜)>에는 무오년(戊午年, 서기 898년) 11월에 아찬 벼슬을 그만두었다고 했다. 하여튼 벼슬을 버린 선생은 홍진(紅塵) 세상을 등지고 명산 대천 경치 좋은 곳을 노닐며, 그야말로 소요자방(逍遙自放)을 즐기게 되었다.

노산 이은상은 부산 해운대 동상비문에 이렇게 쓰고 있다.

"일찍이 태수를 지낸 영남 호남 여러 고을들은 더 말할 것이 없고, 경주의 금오산과 합천의 청량사와 강주(剛州, 지금 경북 의성)의 빙산과 지리산 쌍계사와 동래 해운대와 합표(合浦, 지금 마산)에 있는 월영대(月影臺)와 양산의 임경대(臨鏡臺)와 함양의 학사루(學士樓)가 모두 다 발자국이 미친 유적지요, 또 특히 경북 안동의 청량산에는 치원봉이라 이른 곳이 있으며, 그곳 바윗골 속에 어떤 노파의 모습을 새겨 놓은 곳이 있었는데, 그것이 바로 선생에게 밥을 지어 바치던 식모였다고 전해 왔었다. 이같이 여기저기 바람과 구름을 따라 마음 내키는 대로 떠다니며, 어느 때는 우거진 숲속을 찾아 들어가 나무를 찍어 정자를 매고, 또 어느 때는 흐르는 강기슭에 집을 짓고 화초들을 심기도 하며, 그 속에서 시 읊고 생각하고 책 베고 잠자며 날을 보냈던 것이다."

이 글에서 언급한 유적들은 모두 옛기록에 있는 것들이며 세월이 지나면서 종종의 전설이 붙기도 하고 신비화되기도 했다. 선생은 만년에 합천 가야산으로 들어가 해인사에 머무른 것으로 되어 있다. 해인사에는 모형(母兄)인 부도 현준(浮屠賢俊)이 있었고, 도우(道友) 정현사(定玄師)가 머물고 있어, 그들과 도(道)도 논하고 청담(淸談)도 나누며 유유자적한 세월을 보낸 것 같다. 이무렵 신라 정계는 숨 가쁘게 돌아가고 있었다. 진성여왕은 재위 12년만에 마침내 그 실정을 감당하지 못해 헌강왕의 서자이고 여왕의 조카인 효공왕(孝恭王)에게 양위를 했고, 이어 그 해에 죽고 말았다. 그리고 완산주를 근거로 견훤과 철원을 중심으로 삼은 궁예의 반란세력이 차츰 판도를 넓혀 국가의 기틀을 잡아가고 있었다.
가야산에서 보낸 만년에 대해서는 자세한 동정을 알 길이 없다. 그저 몇 편 남아 있는 시를 통해 심정을 미루어 짐작해 볼 수밖에 없다.

저 중아 산이 좋다하지 말라.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뒷날에 내 발자취 두고 보라지. 
한번 들면 다시는 돌아오지 않으리.
(僧乎莫道靑山好 山好何事更出山 試看他日吾踪跡 一入靑山更不還)

'증산승(贈山僧)'이라는 시인데 어떤 이는 입산시(入山詩)라 일컫는다. 어쩌면 입산하는 결의를

보인 시라고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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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중 은둔(山中隱遁)의 결의를 가장 직설적으로 엿볼 수 있는 것은 '가야산 독서당(讀書堂)'이라는 제목이 붙은 다음의 시다.

 

미친듯 내닫는 물, 바위치며 산을 울리어 
지척에서 하는 말도 분간 못하겠네. 
행여나 세상의 시비 귀에 들릴까봐 
흐르는 물을 시켜 산을 에워쌌구나.
(狂奔疊石吼重巒 人語難分咫尺間 嘗恐是非聲到耳 故敎流水盡籠山)

 

이 시는 합천의 가야산 자락 홍류동(紅流洞) 바위에 석각(石刻)이 되어 있다.

솔바람 소리밖엔 귀를 어지럽히는 소리 없고 
깊숙이 흰구름 아래 띠집을 지었구나.
세상사람 찾아오는 것 정녕 싫어 
티끌 묻은 신발자국 바위 이끼 더럽히리.
(除聽松風耳不喧 結茅深倚白雲根 世人知路飜應恨 石上莓苔汚履痕) 해

 

솔바람 소리만 들으면서 사는 생활, 깊은 골짜기 산허리에 얽은 띠집, 그 속에서 달과 구름과 바람과 나무와 꽃을 벗 삼으면서 옛 글이나 읽고 시나 읊조리는 그런 삶에는 속세의 벗이 찾아오는 것도 사실은 번거로웠는지도 모른다. 사람의 입에 묻어오는 속진(俗塵), 손에 발에 체취에서 풍기는 속세의 풍정(風情)은 아마도 낱낱이 역겨웠는지도 모른다.  어지러우면 다스려지고 난세가 극에 달하면 치세가 오는 것이 인간사의 순환 이치이듯이 신라의 난국도 차츰 새로운 틀을 잡아가기 시작했다.
궁예(弓裔)가 왕을 일컫고 국호를 후고구려(後高句麗)라 하고, 견훤(甄萱)이 또한 왕위에 올라 후백제(後百濟)라 자칭하게 되니, 신라와 더불어 완연히 후삼국(後三國)이 다시 정립(鼎立)하게 된 것이다. 후삼국 중에서도 한때는 궁예의 세력이 다른 두 나라를 압도하는 듯하더니 폭정과 방자로 자멸하고, 그 휘하에서 굴기한 왕건(王建)이 종내에는 중망을 안고 신라와 맞서는 큰 세력으로 등장하기에 이른다. 한반도에 있어서의 이러한 정세의 전개와 가야산 속에서의 선생의 처지에 대해 이우성(李佑成) 교수는 「남북국시대와 최치원(南北國時代와 崔致遠)」(󰡔韓國의 歷史像󰡕)에서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이미 시대는 그를 뒤로 하고 새로운 국면으로 달렸다. 발해는 거란에게 먹히고 신라는 더욱 임종의 잔천(殘喘)을 재촉하였다. 그는 신시대 역사의 창조자는 신흥 지방호족이라는 것을 희미하나마 알듯하였다. '일대삼최(一代三崔)'중에서 최승우(崔承祐)는 후백제의 견훤에게, 그리고 최언위(崔彦撝)는 고려 왕건에게로 가버렸다. 그러나 최치원은 이미 늙었다. 신라 사람으로서의 체질을 바꾸기에는 이미 때가 늦었다. 그도 일찍 왕건에게 큰 기대를 걸면서 시를 지어 보내기도 했다. '계림황엽 곡령청송(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 하여 낡은 신라를 경주 계림의 누런 잎(가을 나뭇잎)에 비기고, 새로운 고려를 개성 곡령의 푸른 솔에 견주어 놓은 유명한 시구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는 결국 왕건에게로 달려갈 수는 없었다. 904년 경 해인사 화엄원(華嚴院)에서 피난 겸 휴양을 취하면서, 현수국사(賢首國師)의 전기를 초하고 있었던 최치원은 결국 가족과 함께 가야산에 은둔하여 여생을 마쳤다."

가야산에 있어서의 생활은 그저 짐작에 머물뿐이다. 정확한 기록이 없는 것이다. 그와 같이 先生의 최후에 대해서도 수수께끼에 싸여 있다. 역시 기록이 없기 때문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 합천군 고적(古蹟)조 독서당(讀書堂)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상에 전하기를 최치원은 가야산에 숨어 살았는데, 어느날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문을 나가 관(冠)과 신을 수풀사이에 남겨두고 어디로 갔는지를 알 수 없었다."

이런 기록은 아마도 당시 참고할 수 있는 고기(古記)를 인용한 것임에 분명하고 사실 여러 곳에 산견(散見)되고 있다. 이로 인해 선생께서는 신선이 되었다는 속설이 생겨나기도 했다.
앞에서 언급한 이우성 교수는 독특하게 자진설(自盡說)을 제기했다.

"가야산도 이 땅의 한 부분이며, 이 땅의 현실과 동떨어질 수는 없었다. 최치원이 서식하던 해인사에는 당시 화엄종의 두 고승이 있어 각기 파당을 이루는데, 한쪽은 관혜(觀惠)로 후백제 견훤의 복전(福田)이 되어 있었고, 한쪽은 희랑(希郞)으로 고려 왕건의 복전이 되어 있었다. 각기 당시의 정치적 세력과 결탁한 이 화엄종의 두 계열󰠏󰠏해인사의 두 갈래 승려들은 완전히 갈라져서 수화(水火)처럼 서로 융화될 수 없었다.…(중략)…세상을 피하여 가야산 물소리 속에 자기를 안탁시키려 했던 최치원은 산밖에서 들려오는 세상소식은 산록의 물소리로 막을 수 있었을런지는 모르지만, 바로 산중에서 벌어지고 있는 불교 종문의 정치적 싸움은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는 어느 날 일찍 밖으로 나가 숲속에 관탕(冠宕)과 신을 벗어둔 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세상에서는 그가 신선이 되어 갔다고 하지만 아마 그는 고민의 해결을 위해 스스로 세상을 버렸을 것이다."

추측일 수밖에 없다. 중들의 정치적 갈등에 선생께서 목숨까지 버릴 이유가 있을 리 없다. 글하는 분이 흔적하나 없이 말이다.

 우리國學의 첫門을 孤雲 崔致遠

선생의 사상(思想)이나 학풍(學風)에 대해서는 더러 소론(所論)이 없지 않다.
첫째는 순유(純儒)가 아니라는 지적이다. 유학에 전념했다기보다 불교에 심취했다고도 한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당시의 시대풍조가 노불(老佛)에 기울어져 있었고, 유자(儒者)일지라도 그들에게 관대했기 때문이며, 선생의 저작 중 유학에 관한 것은 대부분 인멸되어 없어진 대신에 선사비문(禪師碑文) 등 불교 문자는 금석에 새겨져 비교적 많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병도 박사는 <한국유학사략(韓國儒學史略)>에서 선생의 친불적(親佛的)인 경향을 비판한 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신라대(新羅代)에 있어서 삼교(三敎)는 일찍이 반목 갈등을 하지 않고 서로 표리가 되어 관계가 밀접했다. 그러므로 유자이면서 불(佛)과 노(老)를 겸한 자도 있고, 불자이면서 유(儒)와 노(老)를 겸한 자도 있어, 후일의 유자가 일방에 국한된 류가 아니었다. 후유(後儒)가 그 시대의 숭상한 바를 살피지 않고 후일에 숭상한 바와 같지 않다고 공격하는 것은 심하지 아니한가."

성균관대 안병주 교수는 <유교의 민본사상(儒敎의 民本思想)>에서 선생의 정치철학이 유교에 입각하고 있었음을 추단(推斷)하고 있다.

"박제가의 <북학의(北學議)> 서문에 민중의 곤궁을 방관함은 사대부(士大夫)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임을 강조하면서, 스스로의 그 같은 민본정신의 연원을 신라의 최치원과 조선조 선조 연간의 조중봉(趙重峰, 이름은 憲)에 대고 있음이 보이는데, 최치원의 경우는 그의 <시무십여조(時務十餘條)>가 현재 전하고 있지 않아 그 내용을 알 수 없으나 박제가에 의해 그토록 높이 평가되었다면, 그 속에 유교의 민본사상에 입각한 정치철학이 담겨져 있었을 것은 짐작되고 남는다. 실제로 고운(孤雲)의 사상의 계승이라 할 수 있는 고려 초엽 유신(儒臣)들의 사상 속에는 유교의 민본사상이 면면히 이어져 나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둘째는 유학보다는 문학에 더 비중을 두었다는 평이다.
사실 지금 남아 있는 저술을 천착해 보면 그러한 평을 부인할 길이 없다. 학문적 경향이 문학에 더 기울어져 있었던 것이다. 유가에서는 "문이란 도를 꿰뚫는 그릇이다[文者 貫道之器也 :唐 李漢]" 또는 "문이란 도를 담는 것이다[文 所以載道也 :宋 周濂溪]"라 해서, 도문일치(道文一致)를 주장한다. 문은 도를 싣는 그릇이라 보는 것이다. 주자(朱子)는 심지어 "도는 문의 뿌리이고 문은 도의 지엽이다[道者 文之根本 文者 道之枝葉]"라고 말한 것이 있다.
문학은 말하자면 도(道)를 펴는 수단으로 생각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문학에는 도가 들어(실려)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른바 순정(醇正)문학이다. 이러한 경향은 주자학파에 이르러 더욱 심해지고 있다. 앞에서 말한 바와 같이 선생을 보는 눈을 정주학(程朱學)의 시각에 초점을 맞춘다면 많이 굴곡이 될 수가 있다. 노불(老佛)에 관대했고 문학에 기울어져 있었고 더군다나 그 문학이 순정(醇正)치 못하다는 평이 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인물은 시대의 산물이다. 그가 산 시대를 도외시하고 그 인물을 평한다는 것은 땅을 보지 않고 나무의 잎사귀만 따지는 것과 같다. 선생께서 학문을 익힌 곳은 당 제국이었고 포부를 펴려는 곳은 조국 신라였다.
노제국 당에서는 자유분방한 사상의 전개에 힘입어 현란한 문학이 꽃 피어 있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의 중심으로 자부한 문물도 눈부시게 펼쳐져 있었다.
머나먼 이국에서 유학 간 소년이 시대감각을 익히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문학으로 입신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시류에 휩쓸리기 보다는 유학을 지주로 삼았고 문학에 그 특장(特長)을 보여주었다.
고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였다. 당시 신라는 불교의 극성기에 처해 있었다. 유학은 그 속에서 겨우 숨소리만 남아 있을 뿐이었다.
선생의 귀국과 출사(出仕)는 신라 조정에 통치철학으로서의 유교를 재인식시켜 주었고 학계에 새로운 바람을 일으켜 주었음은 지금 남아 있는 종종의 문자로도 엿볼 수 있다. 짐작하기도 어렵지 않다. 아까운 것은 선생의 저술 중에도 유교 문자는 거의 없어진 대신에, 불교 문자는 금석으로, 시부(詩賦) 등 문학작품은 일반의 애호 속에 비교적 많이 전해온 사실이다. 그렇다 치더라도 선생은 그 문학적 업적으로 우리나라 한문학(漢文學)의 비조(鼻祖)로 추숭되고 있으며 그 속에 담겨진 유학정신도 간과하지 않는다.

셋째는 선생께서 고려의 개국을 예언했고 태조 왕건에게 호의를 품고 있으면서 그렇기 때문에 고려 일대를 통하여 추존을 받았다는 일부의 소론이다.
이에 대해서는 이병도 박사가 그 저서 <한국유학사략>에서 명확하게 논단하고 있다.

"또한 치원을 위해 변호할 일건(一件)이 있다. 다름이 아니라 고려 현종 때 치원을 내사령(內史令)으로 추증하고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했으며, 또한 오래지 않아 문창후(文昌侯)로 추봉(進封)했는데, 그 연유를 상고해 보면 치원이 고려 태조가 작흥할 것을 미리 알고서 글을 보냈고, 그 글에 '계림(鷄林, 新羅)은 누른 잎(가을 낙엽)이고 곡령(鵠嶺, 松嶽)은 푸른 소나무'라 한 구절이 있었다. 그래서 추숭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치원은 일찍이 신라 말 제조(諸朝)에서 벼슬해 그 녹을 먹었고 나라가 날로 잘못되어가는 것을 보고는 강해(江海) 사이에서 몸을 깨끗이 한 자이다. 어찌 소인이 하는 짓거리 같은 것을 했겠는가. 이와 같은 말들은 족히 믿을 것이 못되거늘 고려 초에 오히려 믿고 있었으니 적이 의심하건대 그 연유한 바가 있을 것이다. 돌아보면 치원의 문인으로 고려에 벼슬한 자가 적지 않으니 이것이 무리들 속에서 조작된 것이 아닌지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