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가정공파 청(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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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청(淸)이요 자는 직재(直哉)이며 호는 관가정이다.

신라 문창후(文昌候) 고운선조(孤雲先祖) 최치원(崔致遠)의 11세 직계 손이시고 父친은 자운(子雲)으로 고려 판봉상시사(判奉常侍事)이며, 母는 풍양조(趙)씨 광벽(光壁)의 여식으로 정경부인이시고 공민왕 甲申(1344)년에 공을 生(장자) 하였다.

공은 어려서부터 자질이 남달리 청명하고 문학을 좋아하며 이익재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던 바 특히 문학의 깨우침은 물론 거동 또한 뭇사람에 뛰어나 이 선생께서 기특히 여기시어 증손녀 와 혼인토록 하였다.

공민왕 辛丑(1361)년 문과에 올라 보문각 학사(寶文閣學士)가 되었는데 그 해 10월에 홍건족란의 형세가 매우 급박하여 왕 이 향차할 때에 왕을 호종하는 등 공적이 많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승차하였다. 乙巳(1365)년 중서시랑(中書侍郞)에 제수 되었는데 그때 신돈이 권세를 잡아 조정 신하들이 아부하여 그를 따랐으나 공은 오히려 상소를 올리어 논박을 하여 신돈을 꾸짖으니 신돈의 간교에 폄강(貶降)되어 신천 땅 감무관으로 보내오니 공은 주민들에게 은의로 선정하여 3개월만에 태평을 이루었다.

乙卯년(1375) 사복시정(司僕是正)으로 명나라 사신으로 가서 명황제로 부터 자금어대를 하사 받았고 다음 甲子(1384)년 본국에 돌아와 검교정승(檢校政丞)에 제수 되었다 때마침 간흉들이 정권을 전횡하자 개탄하시며 끝내 벼슬을 버리고 초야에 들어가 은둔하시며, 조정사에 대하여 일체 듣지도 보지도 않으셨다. 그 후 이태조(이성계)가 등극하니 뇌은공(隱公) 전귀생(田貴生) 등 당시 제현들과 같이 두문동에 들어가 각기 자신에 뜻을 말하기를 공께서는 멀리 산야에 숨어 세상을 잊고 나무와 밭을 갈면 그 뉘라서 알리오 하고 드디어 양주땅 풍양으로 은둔했다.

조선조 甲戌(1394)년 좌찬성(左贊成)에 제수하고 수차 불렀으나 입조하지 않으니 이태조가 친히 세 차례나 찾아 왔으나 끝내 굴복(屈伏)하지 않고 문을 잠근 채 말이 없으니 이태조는 더 이상 찾지 않아다 하여 그 곳에 있는 산을 어래산(御來山)이라 하였고 그 집을 송정(松亭)이라 하였다 후 현인들은 그 문을 관가정 이라고 하고 또한 호(號)로 칭하고 있다.

공께서 탄식하여 말씀하시기를 산 이름이 어래산 이니 내 어찌 이곳에 살으리요 하고 송산 조견과 같이 송산으로 거처를 옮기고 스스로 송은거사(松隱居士)라고 하니 이는 송도(松都)를 잊지 못하는 정의가 아닌가 한다. 이 사실은 충의록(忠義錄)정원일기(政院日記) 삼강행실록(三綱行實錄) 등에 수록되고 또한 고려사(高麗史)와 황명종신록(皇明從臣錄)에 기록되어있다.

공께서는 고려 충혜왕(忠惠王) 甲申(1344)년에 탄생, 조선조 태종(李朝太宗) 甲午년(1414) 9월28일 壽 71세로 卒하시니 양주 풍양 독정 요곡 축좌지원 (현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읍 용정리 하독정)에 장사지내고 매년(음)10월초6일 후손들이 묘제를 올리며 지금도 최정승 골이라 하며, 임천(서천) 도충사(道忠祀)와 서산 모송사(慕松祀)에 영정(影幀)을 모시고 매년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배위는 경주 李씨이니 좌의정(左議政) 정순공(靖順公) 성중(誠中)의 따님이오 경서와 역사를 두루 잃어 여사풍 이었으며 공민왕 丙戌년(1346)출생하시고 태종 乙丑(1409)년4월27일 享年 64세에 卒하시니 공의 묘지에 부장 하였다.

  ― 야수공파 응벽 (野公派 應壁) 
  ― 참판공파 광문 (參判公派 光門) 
  ― 사천공파 숭문 (泗川公派 崇門) 
  ― 진사공파 포 (進士公派 包) 
  ― 매곡공파 숙정 (梅谷公派 淑淨) 
  ― 덕산공파 흥문 (德山公派 興門) 
  ― 사과공파 경성 (司果公派 敬誠) 
  ― 도촌공파 경의 (桃村公派 敬義) 
  ― 승지공파 신지 (承旨公派 信止) 
  ― 전서공파 검지 (典書公派 儉止) 
  ― 사직공파 한지 (司直公派 漢止) 
상위 파 외 많은 파가 있으나 중복됨으로 기록을 생략함.


 검교(檢校) : 고려, 조선시대 의 훈관(勳官) 이다.

우리나라에서 검교관제가 시행된 것은 당나라가 신라왕에게 검교태위 를 봉책하면서 부터이다. 5대를 거처 송나라 로부터 견원과 고려 태조로 부터 성종에 이르는 역대왕이 훈관의 제수를 받았다. 검교는 고위관직에 자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승진 대상자가 늘어나는 추세 속에 이들의 승진 의욕을 제고하고자 실직이 아닌 훈직을 주어 승진의 기회를 부여하자 는 것이었고 고려 말 조선초에 훈직으로서의 성격과는 달리 검교거관 제 (檢校去官制)였다. 즉 관리로써 장기봉사자에 대한 공훈을 기린다는 의미도 있지만 1품에서 9 품까지의 검교거관을 두었다 (고려사, 고려사절요, 태종, 세종, 문종, 단종, 세조 실록 외 여러 문서에 기재된 문헌에서 알기 쉽게 간추렸다.)

 관가정(觀稼亭) : 백성이 농사짖는 것을 임금이 관람하는 정자로 되어 있다.(삼국지, <이조농업기술사>에 기록)


영정

파조인 관가정공 휘청(淸)의 영정(影幀)은 국내 두 곳에 봉안되어 있다.


 모송사(慕松祠) : 충남 서산시 지곡면 회천리 산114-4

당진 병석씨의 말씀에 따르면 本 영정은 누구의 작품이며, 언제 그려져 있는 것인지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선조들의 기록에 의하면 부성사(富城祠)를 건립하여 고운 시조(始祖)만 모시고 있다가 1921년 청(淸)의 영정을 함께 모시게 되었는데 그 후 영서지방 유림들이 두문동 72현에 기록이 없다하여 1979년도 본전(本殿)이 아닌 동재, 서재로 분리하여 모시게 되었다. 이에 후손들이 도리가 아니라 하여 서산, 당진, 홍성, 태안의 후손들의 정성을 담아 모금하여 1981년 모송사를 건립하고 영정도 모시어 지금까지 음력 3월5일에 춘향제를 봉행하고 있다.

 도충사(道忠祠) : 충남 서천군 한산면 완산리

여기에 모셔진 영정은 누구의 그림이며, 언제 만들어 졌는지 알 길이 없다. 도충사를 건립 후에 어느 때 고운 시조님의 영정과 같이 모셔졌는지도 알 수 없으며, 다만 충의공(忠毅公) 몽양(夢亮)의 영정을 함께 모신 후 지금까지 3분의 영정을 후손들이 모여 음력 3월15일 제향을 봉행하고 있다. 
두문동72현에 명단은 없으나 고려 숭의전사(高麗崇義殿史)에 ○ 경현사지(景賢祠誌) ○ 해동충의록(海東忠義錄) ○ 산록(散錄 ) ○ 항절실 항절반 봉안(抗節室 抗節班 奉安) 31현 ○ 두문동 실기보유(杜門洞實記補遺) 19인에 가담된 고려충신임을 확실한 재료이다.


묘소와 재실

위치 : 경기도 남양주시 진건면 용정리 산49번지(하독정)

묘소는 선조들에 의해 지금까지 보존되어 왔으나 1900년 이전의 사실(史實)이나 고전(古傳)은 없다. 다만 1927년에 신도비를 세운 것을 보아 묘소가 제대로 유지되어 왔다고 보아야 한다. 1981년 후손 종수 회장 재임 때에 사초를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후에 훼손되어 1999년5월15일에 후손 동필 회장 재임 때에 사초하고 수오씨 근찬으로 묘비를 건립하여 지금까지 보존되고 있다.


 모송제(慕松齊) 와 신도비(神道碑)

정확히 기록된 고서와 고증이 전해지고 있지는 않다. 다만 관가정 대종회가 구성될 당시 총무를 보던 밀양의 용식씨가 선조들의 말씀을 전해 듣고 추정하여 기록했으며, 1900년부터는 정확한 고증을 토대로 기록하고 있다. 
먼저 세운 신도비는 풍양(현위치)에 거주하고 있던 동네 어른들의 구전(口傳)에 의하면 공(公)의 신도비가 개천가 논에서 발견되었다고 전하고 있으나 사실을 확인할 고증은 없다. 그러나 1927년 2월 권익상 근찬으로 비(碑)가 건립되었는데 한국전쟁(6,25) 때에 총탄을 맞아 파손되어 子 연지(淵止)묘소 제절 밑에 묻혀져 있던 비(碑)를 발견하였으며, 비문(碑文)의 탁본이 현재 사무실에 보관하고 있다. 
지금의 신도비는 1960년10월 후손 양해씨 근찬으로 묘지 근방에 건립했다. 파조 청(淸)이 은거하신 건물(관가정)은 위치나 흔적을 찾을 수 없었으며, 1900년 전에 3칸짜리 초가집으로 재실이라기보다는 제물을 준비하는 가옥으로 추정되며 이름도 없고 지금의 장소도 아니었다. 다만 1958년 종회를 구성한 뒤 1960년에 후손 영범 초대회장 재임 때 후손들의 성금으로 토지를 마련하여 재실도 건립하고 신도비도 지금장소로 옮긴 것으로 보고 있다. 당시에 건립한 재실에 모성재 현판을 달아 현재까지 보존 사용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