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정공파 해(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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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의 휘는 해 이요, 자는 언명(彦明)이며, 또는 수웅(壽翁) 이시다. 호는 졸웅 (拙翁)이며 또는 예산농은(猊山農隱) 이라고도 한다.

신라 문창후 고운 시조 (최치원)의 12세 손이며, 5세손 선지(善之)의 3자 사직(斯直), 사직의 7세손이다. 父는 민부의랑 백윤(伯倫) 이시며, 母는 진양任씨 대호군 사환(仕緩)의 여식이며, 충렬왕 丁亥년(1287)에 탄생하시었다.

공은 계묘년(1303)에 문과에 급제하여 성균학관을 거처서 예문춘추검열(藝文春秋檢閱)이 되었다. 장사감무로 좌천되었다가 뒤에 예문춘추검열로 기용되었다. 장흥고사(長興庫使)에 임명된 뒤 1320년(충숙왕 7년) 안축, 이연경 등과 함께 원나라의 과거에 응시하였는데 최해 만 급제하여 1321년 요양로개주판관(療陽路蓋州判官)이 되었다가 5개월만에 병을 핑계로 귀국하여 예문응교 검교(藝文應敎, 檢校), 성균대사성이 되었다. 말년에는 사자갑사의 밭을 빌어서 농사를 지으며, 저술에 힘썼다. 평생에 시주(詩酒)로 벗을 삼고 이제헌 민사평과 가까이 사귀었다. 성품이 강직하여 속세에 아부하지 않고 거리낌없이 남의 선악을 밝힘으로써 윗사람의 신망을 사지 못하여 출세에 파란이 많았다. 그는 독서나 창작에 있어서 스스로 깨달음을 중히 생각하였다. 그가 사제관계를 맺은 기록이 보이지 않는 것은(고려사)에서 기술하였듯이 그의 성격이 대단히 곧고 깨끗하였음을 보여준다. 노년에 지은 예산은자전<猊山隱者傳>은 자서전으로 책 속에서 "구차하게 편함을 추구하지 않고 떳떳이 우졸(愚拙)로 살아가겠노라"라고 한 것은 졸옹이라고 자호한 동기와 같다. 말년에 저술에 힘써 고려 명현의 명시문을 뽑아 동인지문<同人之文> 25권을 편찬하였다. 그가 남긴 문집은 졸고천백<拙藁千百> 2책으로 일본에 있으며 1930년 영인 되었다. (고려사.가정집에기록) 충혜왕 庚辰년(1340)에 享年 54세에 卒하시다. 묘는 예산동쪽에 모시고 후손들의 정성으로 제단을(경남 진주시 미천면 안가리)모시고 향사를 지낸다.

배위는 의성 潘씨 검교평리 영원(永源)의 여식이며, 군부인 이시다. 묘는 공과 합장하다.

배위는 평강蔡씨 통예문제후 여식 군부인(郡夫人) 이시다.

  ― 도사공파 반 (都事公派 盤)
  ― 학생공파 소언 (學生公派 素彦)


 성균관 : 고려,조선 때 유교의 교육을 맏아보든 관청 국학 또는 국자감으로 불리든 것을 고려25대 충렬왕34년(1308)에 개칭한 것으로 조선 때까지 계승된 최고의 교육기관임 태학,학궁.

 대사성 : 고려,조선때 성균관에 으뜸 벼슬 정3품 대개 대제학이 겸직 하였느데 지금의 대학총장과 같음 조선25대 순조 이후에 폐지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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