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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 시조님 시<秋夜雨中>

 

최대성[崔大晟]

자 대양(大洋)
조선 1553년(명종 8) ~ 1598년(선조 31) 6월
전라남도 보성 출신의 무장(武將)

◆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대양(大洋). 전라남도 보성 출신. 고운(孤雲) 최치원(崔致遠)과 대사성 최해(崔瀣)의 후손이고, 만사정(曼思亭) 최윤지(崔潤地)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사(都事) 최계전(崔繼田)이고, 아버지는 첨정(僉正) 최한손(崔漢孫)이며, 어머니는 광주 이씨(廣州李氏) 이유정(李有廷)의 딸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천성이 강개(慷慨)했다 한다.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학문도 일찍이 깨우쳤으며 무예가 남달리 뛰어나 1585년(선조 18)에 드디어 무과에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차례 벼슬을 거쳐 훈련원정(訓鍊院正)이 되었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훈련원정의 신분으로 충무공 이순신(李舜臣)을 따라 한후장(?後將)이 되어 거제·옥포·한산·합포·마산포·가덕도·당항포·웅포 해전 등 남해 여러 전투에서 뛰어난 전공을 세웠다. 그 뒤 1597년 정유재란 때 조선의 관군마저도 무너진 상태에서 의병을 결성하기 위해 아들 언립(彦立)·후립(厚立)과 심지어 가노(家奴)까지 총동원하는 비장한 각오로 의병 수천 여명을 모아 모의장군(募義將軍)이란 기치(旗幟)를 달고 의병장으로 나섰다. 특히 순천·광양·고흥·보성 등 20여 곳에서 송대립(宋大立)·전방삭(全方朔)·김덕방(金德邦)·황원복(黃元福) 등과 함께 크고 작은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으로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그러나 이듬 해 6월 전라남도 보성의 안치전투(?峙戰鬪)에서 적을 추적하던 중 적의 유탄을 맞아 장렬히 전사하였다. 이후 그의 순절을 기리기 위해 이 곳의 지명을 ‘군머리[軍頭]’라 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한다.

◆ 위와 같은 그의 혁혁한 공훈은 당시 국가의 혼탁으로 ≪선조실록≫에는 부정적으로 기록된 측면도 없지 않으며, 그 뒤 자손들의 민몰 등으로 오랫동안 묻혀져 인정받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후대 대학자 안방준(安邦俊)을 비롯해 유학 문희순(文希舜)정진하(鄭振河)·이유성(李儒誠)·임흥재(任興材)·안협(安浹) 등 도내 사림(士林)들과 후손들이 여러 차례 상서해 1752년(영조 28) 형조참의에 추증되고, 토지와 함께 정려문(旌閭門)이 내려졌으며, 정충사(旌忠祠)에 제향되었다. 이어 두 아들 언립·후립은 선무공신록에 책록되고, 손자 강(崗)·현(峴)·곤(崑)도 병자호란 시 창의해 삼대가 국가를 위해 충성을 다한 가문으로 역사에 남게되었다. 그 뒤 민몰되어진 그의 유적과 유물을 복원할 길이 없었지만 그의 충혼을 기리려는 도민들의 열의로 1992년 그가 최후의 전투를 치르다 전사한 곳(전라남도 보성군 득량면 삼정리 군두)에 충절사(忠節祠)를 건립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은봉전서(隱峯全書)』
『이충무공전서(李忠武公全書)』
『조선환여승람(朝鮮?輿勝覽)』
『영남인물고(嶺南人物考)』 
[네이버 지식백과] 최대성 [崔大晟]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