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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남 경주최씨 집성촌 마을유래비 제막식 덧글 0 | 조회 5,234 | 2021-11-17 00:00:00
관리자  

경주최씨 집성촌 마을유래비 제막식

2021.11.04 최창규 논설위원






미사촌 유래비渼沙村 由來碑 全文 

미사촌은 옛 지명으로 글자가 의미하듯이 사면이 고운 모래사장으로 둘러싸여 그 모래가 마치 물결치는 것같이 아름다워 미사촌이라 불렀다. 미사촌은 을축년 대홍수로 한강이 범람하여 미사촌 일대가 침수되어 지류인 샛강이 생기면서 한강에서 가장 큰 섬이 되었다. 잔잔하게 흐르는 샛강과 뒤로는 본류인 한강이 장엄하면서도 도도히 흘러가는 물줄기는 인류의 생명줄같이 느끼게 하며 은빛 찬란한 모래사장의 아름다운 모습은 자연이 만들어 준 천혜의 작품이었다. 1973년 팔당댐과 한강 종합개발로 당정섬과 둔지섬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1979년 강변도로가 개설되고 86아시안게임과 88올림픽게임을 위한 조정경기장이 건설되면서 섬이 아닌 육지가 되었다. 미사촌은 사적 제269호 선사 유적이 있어 오래전부터 살기 좋은 곳으로 예고되었다. 미사촌에 최초로 경주최씨 집성촌이 형성된 것은 1594년경 통일신라 시대 대문장가요. 한문학의 비조이신 문창후 고운 최치원 선생의 18세손 회중공(최근 1562~1623)께서 정착하면서 미사촌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회중공은 조선(명종 17) 포천에서 출생하여 일찍이 율곡 문하에서 학업을 닦고 벼슬길을 준비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장에 추대되어 전투를 승리로 이끈 공로를 인정받아 정이품 자헌대부에 가자 되었으나 임란 이후 정국이 붕당의 갈등으로 혼란해지자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던 중, 주변 경관이 수려하고 비옥한 땅은 사람이 살기에 좋은 조건이라 미사촌을 삶의 터전으로 뿌리를 내려 한때는 미사촌 경주최씨가 200여 호에 이를 정도로 많은 일가를 이루고 살아 인근에서는미사리 최씨라고 부르기도 했다. 미사촌에서 분파된 경주최씨는 하남을 비롯하여 수도권에 1만 명의 후손들이 살고 있으며, 미사촌은 물과 관련하여 300여 년 동안 마을의 안녕을 지켜주는 성황제가 오늘날까지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미사촌은 많은 인물이 나왔지만, 특히 최인규 장관(외자청장·국회의원·교통부장관·내무부장관 역임), 최종윤 국회의원, ()형애장학회 최형규 이사장, 경주최씨중앙종친회 최병주 회장, 이화여자대학교 최완기 교수, 동국대학교 최종세 교수 등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다. 현재 미사리는 대단위 시설채소 농가 등이 유입되면서 많은 성씨와 함께 아름다운 전통의 맥을 이어가고 있다. 본 유래비는 옛 모습이 사라진 경위와 마을의 안녕을 기리고 전광석처럼 변해가는 시대를 기리기 위해 마을 주민의 뜻을 모아 미사리 경주최씨의 정성으로 유래비를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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